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경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D76472D-6449-48A2-875E-7843566499E2.jpg|width=100%]]}}}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1 1976년 당시 공동경비구역 지도}}}'''}}} ||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사령부|유엔군]] 측 3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OP 5)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이 문제는 [[미루나무]]가 3초소와 5초소 중간에 위치한 데다 무럭무럭 자라며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8월 3일 [[유엔군사령부|UN군]][* [[한미연합군사령부]]는 2년 뒤인 1978년에 창설되어 [[유엔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과 겸임)이 [[한미연합사령관]]을 겸임하게 된다.] 경비대 작업반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3초소가 위험하니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이에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UN군 병사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이 다가와 이의를 제기하면서 돌아가라며 작업을 중단시키자 UN군은 일단 후퇴하였다. 이후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시야확보를 위한 [[가지치기]]만 하는 것으로 작업을 결정, 오전 10시 30분 한국인 노무자 5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으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UN군 장교 2명 및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에 나섰다. 그러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차 항의했으나 UN군은 베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했고, 이에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상층부에 연락을 한 뒤 답이 오자 가지치기 정도면 OK라고 수긍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지치기 작업은 순조로웠고 북한군은 오히려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2076_61867_0404.jpg|width=100%]]}}}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1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 || 그런데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박철 [[중위]][* 본명은 홍성문으로 평소 군화에 쇠징을 박고 다닐 정도로 괴짜였고, 행실이 워낙 개차반이라서 [[한국군]]에서는 '''[[미친개]]''', [[미군]]에서는 '''[[불도그|BULLDOG]]'''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년 전 [[헨더슨 소령 사건]]을 주도한 전력도 있었다.] 등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났고 박철 중위는 보니파스 [[대위]]에게 갑자기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방금 전에 북한군이 허용해놓고 갑자기 또 중단하라는 박철 중위의 말을 무시하고 작업을 속행할 것을 지시하자 박철 중위는 북한군 1명을 북한 경비본부로 보냈다. 그렇게 11시 30분경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도착했다. 이 때 박철 중위가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재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무시했다.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신호를 보내자 북한군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 5명이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서 살해'''했다. 마크 배럿 [[중위]]는 구타를 당한 채 방치되었으며 발견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이송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을 당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s1.blogger.com/bonifasbarrett.jpg|width=100%]]}}}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1 (좌) 아서 조지 보니파스 ^^Arthur George Bonifas^^ [[소령|{{{#fff 소령}}}]][* 추서 계급] (1943년 4월 22일생)[br](우) 마크 톰 배럿 ^^Mark Thomas Barret^^ [[대위|{{{#fff 대위}}}]][* 추서 계급] (1951년 6월 9일생)}}}'''}}} || 보니파스 대위는 사건 당일 한국에서의 근무가 3일 남은 시점이었고, 후임 중대장 역시 JSA에 투입되어 인수인계 과정 중이었기에 가지치기 작업 감독 지휘 정도는 충분히 후임 중대장에게 인계할 수 있는 업무였다. 배럿 중위는 JSA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대외조사부 부부장[* 1922~1998. 10.26 이후, 동향인인 대만 대사 [[옥만호]]를 포섭하기 위해 대만으로 파견되었다가 대만 현지 당국에 체포, 남한으로 송환된 후 전향하였으며 북한 정부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용규, 신경완, 신평길 등의 가명과 필명을 썼다.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안기부가 만들어낸 가짜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으나 엄연한 실존 인물이고 1970년에 체포된 공작원 김진계와의 대질 심문을 통해서 재확인되기도 했다. 다만 정체를 워낙 드러내길 꺼려서 돌아다니는 직함도 정무원 부부장,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 중구난방이지만 대남 공작부서였던 대외조사부 부부장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까지 올라갔었다고 한다.]의 증언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당시 [[주석(직위)|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아닌 후계자 수업을 듣던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UN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현장에 한국인 노무자 5명이 있었지만 단 한 명도 부상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